Ⅰ. 머리말
부산광역시 기장군 만화리 산 72번지에 소재한 <차릉>은 연안 차씨 문중에서 모시는 선조 묘의 하나로 신라 제39대 소성왕(昭聖王, 재위기간 799~800)과 제40대 애장왕(哀莊王, 재위기간 800~809)을 도와 국정을 총괄했던 차건신의 묘로 전하고 있다. 기존 문헌기록에는 관련 내용이 전하지 않지만, 전승에 따르면 “소성왕과 애장왕을 보필하다가 돌아가시자 애장왕이 마치 부모를 잃은 것과 같이 지극히 슬퍼하여 왕례로 이곳에 안장하고 <차릉>이라 부르게 되었고, 소성왕묘(昭聖王廟)에 배향하고 신라 제42대 흥덕왕(興德王)이 그 고을[기장현(機張縣) 만화동(萬化洞)]을 높여 차성(車城)이라 하였다.”고 전한다. 이후 관련기록은 전하지 않지만 조선시대 후기 순조 때 인물로 기장으로 유배된 심노숭(沈魯崇, 1762~1837)의 저술인 『효전산고(孝田散稿)』 『남천일록(南遷日錄)』은 심노숭이 순조 1년(1801) 2월 29일부터 순조 6년(1806) 6월 15일까지 기장에서 유배생활을 하면서 남긴 기록으로, 출발에서 유배가 해제되기까지 날짜순으로 기록한 일기이다. 내용은 유배길을 왕복하는 기간 16일과 유배지에서 생활한 1,949일간의 내용에는 유배생활에서 느낀 소회, 견문, 고금치란, 인물의 blank_img15x10.gif선악, 산천과 풍토, 벌레와 고기, 운연(雲煙)의 변화가 수록되어 있다.
에 수록된 일기인 「남천일록(南遷日錄)」안에 “기장읍 동쪽 3리의 만화동에 거대한 분묘가 있는데 옛날부터 각간(角干)의 묘라고 한다.”고 기록된 점은 <차릉>에 대한 당시 사람들의 인식이 이때부터 다시 이루어졌음을 알려준다. 그러므로 조선시대 후기에 현지 사람들의 인식한 <차릉>의 모습은 앞선 시기에 살았던 사람들이 공유했던 문화정보로 중요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
한편 <차릉>은 1985년 11월에 경상남도 지방문화재 제185호로 지정되었지만, 기장군이 부산광역시로 편입되는 과정에서 지방문화재로 이관되지 못한 채, 그 지정이 취소되어서 현재는 지방문화재에서 해제된 상태이다. 이런 현실로 인해 <차릉>에 대한 문화재 재지정문제를 문중을 비롯한 여러 관계자들이 노력하였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현재까지 지정신청작업이 이루어지고 있다.
이에 본 글에서는 <차릉>이 소재한 부산광역시 기장군 만화리 일대에 대한 지표조사를 통해서 확인된 내용과 1970년대 수축된 능의 과거 모습과 특징을 살펴보고, <차릉>의 원 모습에 대한 복원을 시도하고자 한다. 또한 현재 매년 문중에서 진행하고 있는 제향이 기장군의 지역 역사 속에서 가지고 있는 문화가치와 특징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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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남천일록(南遷日錄)』은 심노숭이 순조 1년(1801) 2월 29일부터 순조 6년(1806) 6월 15일까지 기장에서 유배생활을 하면서 남긴 기록으로, 출발에서 유배가 해제되기까지 날짜순으로 기록한 일기이다. 내용은 유배길을 왕복하는 기간 16일과 유배지에서 생활한 1,949일간의 내용에는 유배생활에서 느낀 소회, 견문, 고금치란, 인물의 선악, 산천과 풍토, 벌레와 고기, 운연(雲煙)의 변화가 수록되어 있다.
Ⅱ. 차릉의 현상과 특징
<차릉>은 부산광역시 기장군 만화리산에 자연구릉을 이영하여 인공적으로 조성한 3단의 석축 위의 정남향으로 배치되어 있으며, 규모는 봉분 둘레 22.3m, 봉분 바깥 경계석둘레 31.8m, 봉분 높이 2.5m,호석 전체높이 95㎝, 면석 높이 67㎝, 면석 너비 60㎝, 탱주 너비 30㎝이다. 면석과 탱주 사이는 시멘트 모르타르로 접착하였으며, 면석에 새겨진 십이지신상은 평복차림으로 전체 모습은 경주 괘릉의 배치와 형태를 모방하였다. 현재는 부산시 연안 차씨와 문화 류씨 종친회에서 무덤을 관리하고 있으며, 1956년에 성균장 의성(義城) 김창숙(金昌淑)선생이 찬한 비석이 세워져 있다.
1. 新羅丞相車公之墓碑文
<원문>
我國東海上機張縣北萬化洞負乾子坐之阡崇若陵故新羅承相車公諱建甲體魄之藏也而俗稱車陵者以王禮葬之故也當昭聖王時以耆耈宿德爲國柱石王以太子幼冲公族强橫憂之授公以周公負成王朝諸候之圖公受顧命扶太子以嗣位是爲哀莊王年十二公盡忠輔導用衛王室及公之捐館以其大勳勞特命以王禮葬之陞機張爲車域盖異數也其先軒禹之後姓王氏有諱受兢爲箕子時士師輔成八條之治至新羅太祖時有諱曰蒙官侍中以王爲車名無一其後有諱儉夫官承相配楊氏寔公之考妣也配昔氏子承穡官承相彦昇弑哀莊王自立承穡與其子恭叔謀復君讐伺彦昇出獵伏兵橋下事泄購捕甚急避入于儒林九月山變姓柳名穡子恭叔亦爲淑仍居儒州六傳而有曰柳車達富甲一國當麗太祖征羅濟也造車千乘饋餉不絶以其功錄統合三韓壁上原勳拜大承其二子長曰孝全褒首功復姓車拜大匡伯封延安君次曰孝金仍姓柳拜左尹封文化君是車柳兩姓所以分也至麗鮮革命之際延安君之裔有曰原頫諡文節與圃治齊名當時遇害於孼禍事載雪寃錄而列聖朝廔蒙盛典世稱雲巖先生是也後復車柳二氏俱繫衍爲通國大族名公鉅卿史不絶書是何赫赫耶於乎公之衣履托于玆邱距今殆千有餘年封域尙完而隧儀已泐爲子姓之齎咨久矣今車氏之居草漢者相與謀曰是不可以小緩也使仁薰赫誠二君告于不佞曰石已具矣敢徼子以一言之惠余曰善哉慈孫之篤于報本不亦恔乎余嘗見羅麗之史則車氏以三韓甲族之一也而I謹案其世乘略綴其勳蹟系序之著顯焉
檀紀 四二八九年 丙申 大暑節
成均館長 義城 金昌激 撰
<국문>
신라승상차공지묘비문
우리나라 동해 바닷가의 기장현〈機張懸) 북쪽 만화동(萬化洞》부건자좌(負乾子坐)의 왕롱처럼 높은 무덤은 고 신라 승상 차공(車公) 휘 건갑(建甲)의 체백<體魂)을 묻은 곳으로, 시속에서 차릉(車陸)이라 일컫는 것은 왕의 예로 장사를 치렀기 때문이다. 신라 소성왕(昭聖王) 때 덕망 높은 원로로서 국가의 주석이 되었다. 소성왕은 태자가 어린데 공족(公族)이 강성함을 우려하여, 공에게 주공(周公》이 성왕(成王)을 업고 제후의 조회를 받는 그림을 주었다. 공은 고명(顧命)을 받고는 태자가 왕위를 계승하도록 도왔는데, 이분이 애장왕(哀莊王)으로 나이 열둘이었다. 공은 충성을 다하여 보필하고 인도 하여 왕실을 호위하였다. 공이 세상을 버리자 그 큰 공로 때문에 특별히 왕의 예로 장사하도록 명하고 기장을 차성(車域)으로 승격하였으니, 대개 특별한 은전이었다.
그의 선조는 헌원씨(軒轅氏)와 우(禹)의 후예로 성은 왕씨(王氏)였다. 휘 수긍(受兢)이 라는 분이 있어서 기자(箕子》시대에 사사(士師)가 되어 팔조(八條)의 정치를 보필하였다. 신라 태조 시대에 이르러 휘를 몽(蒙)이라고 한 분이 있어서 관직이 시중(侍中)이었는데,왕(王)을 차(車)로 하고 이름을 무일(無一)이라 하였다. 그 뒤에 휘 검부(儉夫)라는 이가 있었는데 관직이 승상(承相)이었고 배위(配位)가 양씨(楊氏)였는데, 이 분들이 공의 고(考)와 비(妣)이시다. 배위는 석씨(昔氏)이며, 아들 승색(承稿)은 관직이 승상(承相)이었다.
언승(彦昇)이 애장왕을 시해하고 스스로 왕이 되자. 승색은 그 아들 공숙(恭叔)과 함께 주군의 원수를 갚으려고 도모하여, 언승이 사냥 나가는 기회를 노려 다리 아래 군사룰 숨겨두었다. 일이 누설되어 체포령이 매우 다급하자 피신하여 유림(儒林)의 구월산 (九月山)으로 들어가서 성을 류(柳), 이름을 색(穡)이라 바꾸고, 아들 공숙 역시 숙 (淑)이라고 하여 그대로 유주에 거주하였다, 6대를 전하여 유차달(柳車達)이라는 분이 있었는데 한 나라의 으뜸가는 부자였다. 고려 태조가 신라와 후백제를 정벌할 때 수레 천 대를 만들어 군량 조달이 끊이지 않았다. 그 공으로 통합삼한벽상원훈(統合三韓壁上原勳)으로 수록되고 대승(大承)으로 임명되었다. 그 두 아들 중 장남은 효전(孝全)이라 하였는데, 으뜸가는 공으로 포상받아 차(車)씨 성을 회복하고 대광백(大匡伯)에 임명되고 연안군(延安君)으로 책봉 되었으며,차자는 효금(孝金)이라 하였는데 류(柳)씨 성을 그대로 하여 좌윤(左尹)에 임명되고 문화군(文化君)으로 책봉되었는데, 이것이 차씨와 류씨 두 성씨가 분파된 까닭이다.
고려와 조선 왕조의 천명이 바뀔 무렵에 연안군의 후예 중에 원부(原頫)라는 분이 있어서 시호가 문절<文節》이었는데, 포은(圃隱) 야은(冶隱)과 명성이 나란하였으나,당시의 뜻밖의 재앙에 화를 당하여 그 사실이 설원록(雪冤錄)에 실려 있으며, 열성조에서 여러 번 성대한 은전을 받았으니, 세상에서 운암선생(雲巖先生)이라 일컫는 이가 이 분이다. 그 뒤로 다시 차(車) 류(柳) 두 성씨는 모두 번성하여 온 나라의 대족(大族)이 되어 명공(名公)과 거경(鉅卿)이 역사 기록에 끊이지 않았으니,이 얼마나 혁혁하냐!
오호라. 공의 무덤이 이 언덕에 의탁한 지가 지금까지 거의 천여 년인데 봉분과 묘역은 아직도 온전하나, 묘소의 의물(儀物)은 이미 퇴락하여 자손들이 안타까워한지 오래였다. 이제 초계(草漢)에 사는 차씨들이 서로 의논하기를 이 일은 조금도 늦추어서는 안 된다”고 하고는, 인훈(仁薰)과 혁성(赫誠)두사람을 보내어 나에게 고하기를 "비석이 이미 갖춰졌으니,감히 그대가 한마디 말을 주시기 바란다.”고 하였다. 나는 말하기를 “좋도다. 자손(慈孫)이 보본(報本)에 독실함은 또한 좋은 일이 아니겠는가?”라고 하였다. 내 일찍이 신라와 고려의 역사를 살펴보았더니,차씨는 삼한(三韓) 갑족(甲族)의 하나인지라, 삼가 그 세승(世乘)을 살펴보고 그 공훈과 사적과 계보의 현저한 부분을 대략 얽어 놓는다.
단기 4289년 병신년(서기1956년) 대서절(大暑節).
성균관장 의성 김창숙(金昌被) 찬.
그림 2. 차릉 전경
2. 차릉의 현상과 특징
<차릉(차건신 묘)>은 자연 구릉의 능선을 따라서 3단으로 단이 지는 지형을 이용하여 묘를 조성했지만, 이후 여러 차례 이루어진 개건 및 수축작업을 통해서 현재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한국 묘제에 있어서 이렇게 자연능선을 따라서 묘역을 구분한 모습은 주로 고려~조선시대 초기에 많이 나타난다.
1963년 분묘 바깥쪽에 새롭게 호석을 돌리고 석부재를 교체하면서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 당시 수리공사 중 촬영된 사진을 살펴보면 과거 존재했던 일부 석부재의 모습이 확인되며, 현 묘역 내 축대와 주변에서 확인되고 있다.
먼저 묘역 안에서 가장 오래된 석부재는 상석 받침인 고석 2점과 망주석을 받치기 위한 팔각지대석으로, 조선시대 개건 당시 모습을 추정할 수 있는 중요한 증거자료이다.
고석(鼓石)은 북 모양의 석물로서 조선왕릉에서는 고석을 5개 사용하는 것이 많으나 구 영릉에서는 네 모서리에 각각 하나씩의 고석을 사용하였다. 조선시대 초기의 고석은 1점만이 남아 있지만, 그 모습을 보면, 중간이 불룩하게 만들어진 고석은 4면에 도깨비 무늬가 도드라지게 새겨져 있고 그 위아래로는 구슬띠 모양의 무늬가 둘러져 있는 모습이다.
그림 3. 묘역 내 고석1
그림 4. 묘역 내 고석 2, 3
따라서 <차릉>에서 확인된 고석은 분묘가 수축된 시점을 보여주는 자료인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현재 확인된 고석 중 2점의 측면에는 굵은 고리가 양각으로 모각된 모습이다. 크기는 지름 약 30㎝, 높이 20㎝ 정도로 형태는 조금 납작한 편구형이다. 위쪽과 아래쪽 경계부에 양각된 돌대를 돌린 모습이다. 현재 확인되는 고석이 2점인 점은 당시 상석을 받쳤던 석물로 사용된 석부재가 2점이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이는 조선시대 때 왕릉을 제외한 사대부의 분묘에 사용된 상석의 크기를 정하지 않은데 기인한다. 또한 사대부의 분묘는 분묘 앞쪽이 2계절로 되어 있기 때문에, 계절에 봉분과 상석을 함께 설치하거나, 계절의 계체석(階砌石) 2)에 두 모서리를 걸치게 하여, 아래 하계절인 배계절(拜階節) 3)에 설치하기도 하여 고석이 필요없거나, 그렇지 않은 경우 두 개만 필요하게 되어 있다. 이런 점으로 볼 때, <차릉>에서 확인된 3점의 고석은 4개를 상석받침으로 사용한 사례로 보인다. 다만 고석의 표면 가공수법을 보면 기계를 이용한 작업이 보이지 않으므로, 만든 시기는 조선시대 후기 경으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이 고석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1801년(조선 순조 11) 8월 11일에 심노숭(沈魯崇 1762~1837)이 기장읍 만화리에 소재한 <차릉>을 보고난 후, 이루어진 분묘 수즙과 관련될 가능성을 지적할 수 있다.
망주석(望柱石)은 무덤을 꾸미기 위하여 무덤 앞의 양옆에 하나씩 세우는 돌로 만든 기둥이다. 망두석(望頭石)·망주석표(望柱石表)·석망주(石望柱)라고도 하며, 줄여서 석주(石柱) 또는 망주라고도 한다. 또 한편으로는 화표주(華表柱)라고도 부른다.
조선시대 초기에 만들어진 『국조오례의』에 의하면 능원에 설치되는 망주석은 크게 기둥 부분과 대석(臺石)으로 나뉘어 있다. 기둥의 길이는 모두 7자 3치이며, 아랫부분 7치 정도는 둘레를 둥글게 깎아내 대석의 팬 곳에 세우도록 되어 있다.
기둥의 윗부분의 1자로는 둥근 머리[圓首]를 만들고 그 아래 1자 3치 가량은 둥글게 하여, 그 윗부분에는 구름무늬[雲頭]를, 아랫부분에는 주렴[簾衣]을 새긴다. 그리고 그 밑에는 구멍을 뚫는다. 나머지 4자 3치는 8각으로 깎는다.
대석은 높이 3자 6치, 지름 2자 6치를 아래위로 똑같이 나누어 그 가운데에 허리를 만드는데, 길이를 6치 1푼으로 한다. 위층의 아랫가에 앙련엽(仰蓮葉)을 새기며, 아래층의 윗가에는 복련엽(覆蓮葉)을, 아랫가에는 운족(雲足)을 새긴다.
전체 대석의 위층이나 아래층 허리는 모두 8각으로 하며, 그 아래 1자는 땅 속에 묻는다. 이 설명에 따르면, 망주석의 길이는 모두 10자 내외의 크기라고 하겠다.
그림 5. 묘역 내 육각지대석
그림 6. 묘역 내 육각지대석
그러나 일반적으로 이러한 격식은 제대로 지켜지지 않은 채 다양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고려시대의 망주석에는 윗부분에 구멍을 뚫은 예가 보이고 있으나, 조선시대의 것에서는 거의 보이지 않고 있다. 또한 기둥과 대석을 따로따로 떼어 만들지 않고 전체를 하나의 돌로 다듬어 만든다든가, 머리를 연꽃 봉오리의 모양으로 만든다든가 하는 형태차이가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팔각기둥에 다람쥐를 양쪽에 새긴다든가, 대석 부분을 탁자모양으로 깎는 것들도 보이고 있다. 특히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전체의 모습이 마치 횃불모양을 연상시키는 양식화한 모습을 보이는 망주석이 흔히 만들어지고 있다.4)
<차릉>에서 확인되는 것은 육각형의 망주석 지대석으로 중앙에 원공과 육각형 홈이 확인된다. 또한 망주석 지석대 측면에 돋을 새김장식이 확인되는 점은 이 석물의 제작시기가 조선시대보다는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석물의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따라서 현재까지 확인된 석물을 기준으로 <차릉>의 묘역의 변화모습은 다음과 같이 추정해 볼 수 있다.
- ?. 축조
- 1801년 8월 11일. 심노숭 방문 : 묘역 수리, 상석 및 고석 배치
- 일제강점기 : 팔각형 망주석 지대석 등 석물 설치
- 1963년 : 묘역 정비 및 현재 석물 설치, 축대 신설.
이상과 같은 묘역의 변화과정을 추정해 본다면, 현재 석축 안에 포함되어 있는 고석은 조선시대 말에 이루어진 묘 수즙과정과 관련된 유물로 판단된다. 그리고 그 시기는 심노숭의 묘역 방문이후이므로 1801년 8월 이후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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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2) 무덤 앞에 평평하게 만든 땅과 아래의 계절을 구분하기 위해서 놓는 장대석
주3) 무덤 앞에 절을 하기 위하여 계절보다 한 층을 낮추어 평평하게 만든 땅으로서 배제절(拜除切)이라고도 함.
주4) 한국학중앙연구원, 「망주석[望柱石]」, 『한국민족문화대백과』
그림 7. 묘역 공간 내 조선시대 백자 및 옹기편 노출상태
3. 묘역의 관리와 제향문제
현재 <차릉> 아래쪽에는 배향을 위한 공터가 마련되어 있다. 이곳은 완만하게 경사를 이루면서 산 아래쪽으로 내려가는 능선 정부로 주변에는 김창숙 선생이 찬한 비석이 새워져 있다. 현지 지표조사 당시 현 지표면에서 조선시대 백자와 옹기편이 흩어져 있는 모습이 확인되어서 주변 일대를 살펴본 결과, 현 지표면 위에 조선시대 그릇편이 흩어져 있음을 확인하였다.
현재 확인되는 기물은 백자와 옹기로 소편으로 산일되어서 자료적 한계를 가지고 있지만, 조선시대 중기 유물로 판단된다. 따라서 이들 기물편은 당시 <차릉>에서 배향된 제사와 관련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으며, 그 연원이 조선 중기까지 올라갈 수 있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조선시대 중기까지 후손들에 의한 제사가 이루어졌음이 확인되므로, 당시 묘역에 대한 관리와 배향활동의 진정성을 확인할 수 있는 기준이 된다.
Ⅲ. 차릉의 관리와 의례
<차릉>과 관련된 구전을 살펴보면 언제부터인가 후손들뿐만 아니라 주변지역 주민들의 민속신앙대상이 되어 왔다. 마을에 전해오는 어른들의 말을 옮기면, “벌써 몇 백년 전 부터 매년 명절 때, 매월 초하루, 보름, 그 밖에도 수시로 많은 사람들이 참배하며 기도를 드렸다고 한다. 예부터 이 <차릉>에 정성을 다해 기도하면 한 가지 소원은 이루어진다는 전설이 있기 때문이다.”라고 한다. 요즈음에 와서는 매년 음력 正月과 대학입시 때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참배하고 있으며 음력 9월 9일에 거행하는 세향대제(歲享大祭)에는 문중 내 후손을 위시하여 수천명의 참배객이 모여 든다고 한다.
그림 8. <차릉>의 중양제사
그림 9.<차릉>의 중양제사
그림 10.<차릉>의 중양제사
그림 11.<차릉>의 중양제사
현재 기장군 기장읍 만화리의 <차릉>에서는 차씨와 류씨 문중에서 매년 중양절이면 이곳에서 제사를 지낸다.
8월에 차씨와 류씨 양 문중이 회의를 열어 제주와 헌관을 선정하고 묘제 준비를 한다. 헌관은 주로 종친회에 공로가 큰 사람으로 선정한다. 제수를 비롯한 묘제 준비는 차씨와 류씨가 2년씩 번갈아 가면서 하는데, 경비는 문중의 회비와 중양 제사 당일 모인 성금[보통 1천만 원 정도]으로 충당한다. 제수는 메[밥], 갱[국], 국수 등의 익힌 음식을 비롯하여 일반 기제사와 같이 준비한다.
차릉에서의 중양제사는 중양절인 음력 9월 9일 12시 무렵에 지내는데 많을 때는 1,400명, 적을 때는 700~800명 정도의 인원이 참석한다. 차씨는 연안 차씨만 참석하고, 류씨는 8개의 본이 모두 참석한다. 조상께 술을 올리는 사람인 헌관은 차씨와 류씨가 분담하는데, 묘제를 준비하는 쪽에서 초헌을 한다. 초헌이 차씨이면 아헌은 류씨 종헌은 차씨이고, 초헌이 류씨이면 아헌은 차씨 종헌은 류씨이다.
제의 절차에서 특이한 점은 일반적인 묘제가 산신제를 먼저 지내고 조상 묘에 제사를 드리는 반면, <차릉>의 중양 제사에서는 <차릉>에 제사를 지내고 산신제를 지낸다. 그 이유는 차건신의 공로가 커서 왕의 무덤에 해당하는 ‘릉’의 칭호를 받았으므로, 차릉의 제사를 여느 제사보다 먼저 지내는 것이다.
제사는 일반 가정의 기제사와 유사하나 유식이 없다. 순서는 조상신께 참배하는 참신, 조상신을 모시는 강신, 첫 술을 올리는 초헌, 밥뚜껑을 열고 숟가락을 꽂는 개반 삽시, 젓가락을 적(炙) 위에 올리는 정저(正箸), 축문을 읽는 독축, 두 번째 술잔을 올리는 아헌, 마지막 술잔을 올리는 종헌, 조상신을 전송하는 예식인 사신, 수저를 내리고 밥뚜껑을 닫는 철상, 그리고 음복의 순이다. 헌관들은 술을 올리기 전에 손을 씻으며, 초헌은 고위(考位)[할아버지 신위] 잔만 올리고 종헌과 아헌은 고위 잔과 비위(妣位)[할머니 신위] 잔을 함께 올린다.
Ⅳ. 차릉의 문화재 가치
<차릉>은 통일신라시대 인물인 차건신의 묘로 전하는 분묘로 일광산(日光山 ; 해발 388m)에서 내려온 셋드산(해발 136m)을 끼고 남서쪽으로 흐르는 만화천(萬化川)이 기장읍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 이러한 모습은 풍수지리적으로 볼 때, 멀리 일광산(日光山)을 종산(宗山)5)으로 하고 양달산(陽達山 ; 해발 282m)을 망산(望山)으로 하여 기장천(機張川)을 좌로하고 좌 청용(靑龍)에는 기장읍과 일광(日光)을 가르는 해안산릉(海岸山陵)이요, 우 백호(白虎)는 일광산(日光山) 남쪽 능선을 넘어 철마(鐵馬)에 이르니 현무수두(玄武垂頭), 주작상무(朱雀翔舞), 청용완연(靑龍蜿蜒), 백호순부(白虎馴頫)의 전형적인 길지(吉地) 형세를 하고 있으며6)
, 자좌오향(子坐午向)7)
으로 명당(明堂)의 조건을 거의 갖추고 있는 곳이다. 이를 풍수지리적 위치로 본다면 <차건신 묘(車陵)를 혈(穴)자리로 한 옥녀직금형(玉女織錦形)으로 기장군의 형세가 베틀을 차려 놓은 것 같다고 하여 기장(機張)이라고 불렸다는 지명 유래담이다.
그림 12. 차건신 묘(차릉)을 중심으로 본 풍수지리 입지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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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5) 풍수지리학 상의 용어로, 혈(수맥)과 용(산맥)의 조화가 크게 이루어진 산을 말한다. '원고산'이라고도 하며 주로 큰 강을 끼고 있는 높은 산을 말할 때 쓰인다.
주6) 이 내용은 풍수지리에서 주산은 주인이나 임금답게 위엄을 갖추어야 하나 험악하거나 지나치게 위압적이면 좋지 않고, 안산·조산(朝山)은 신하나 아내처럼 결코 주산을 압도해서는 안 되며 내리 눌러서도 안 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국립중앙도서관에 도선이 지었다고 전하는 「도선답산가」에는 “頭圓朱雀 如鼓起 玄武垂頭 兩水間······ 靑龍蛇蛇 頭高起 白虎徐行不欲殘”라고 표현되어 있다. 이 내용은 “꼭대기 완만한 주작이 북소리처럼 일어나고, 현무의 드리운 머리가 두 물줄기 사이에 있구나······청룡이 편안하게 퍼지며 머리를 높이 일으키고, 백호는 천천히 가니 해치려 하지 않네.” 정도의 의미이다. 즉, 완만한 안산인 주작과, 주산인 현무 앞으로 갈라져 들어오는 명당수(明堂水), 좌우에서 거역의 자세를 취하지 않고 혈을 감싸 안은 듯한 청룡과 백호의 모습을 읊은 것이다. 이러한 표현은 전통적인 풍수지리 명당의 지세를 노래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주7) 子方(자방)에서 午方(오방)을 향함. 정남방으로 자리를 잡고 앉음.
또한 “아주 오랜 옛날 하늘나라 옥황상제의 딸 옥녀(玉女)가 인간 세상을 내려다보았는데, 마치 베틀을 차려 놓은 것과 같은 곳을 보고 구름을 타고 그 곳으로 내려왔다. 옥녀가 사방을 둘러보니 높이 솟은 일광산(日光山)과 연화봉(蓮花峰), 베틀처럼 생긴 털음산[毛山]과 성산(筬山), 물레처럼 생긴 만화동(萬化洞) 앞에 용소골[龍沼洞]과 사라수[士羅洞], 장미수(長尾水)의 삼수가 합하여 청강천(淸江川)이 되어 흐르는 것이 바람을 재우고 물을 얻는 장풍득수(藏風得水)의 명당이었다.
그녀는 물레자리[車陵]에서 물레를 돌려 비단실을 만들고, 털음산을 베틀로 삼고, 백두산의 큰 바위로 베틀을 괴는 받침돌로 삼았다. 버드나무 언덕에서 날고 있는 황금 새로 황금 북을 삼아 직금루(織錦樓)에서 비단을 짰는데, 인어가 이 소리를 듣고 베틀가를 불렀다고 한다. 그래서 후에 사람들이 이곳을 옥녀가 베틀[機]을 차려 놓고[張] 비단을 짠 곳이라고 하여 기장이라 불렀고, 기장을 부르는 다른 이름인 차성(車城)은 물레[紡車]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한다."
이 내용은 ‘옥녀 직금형의 풍수’, ‘기장의 지명 유래’ 등과 관련된 내용으로 기장이란 베틀을 차려 놓은 것 같다고 하여 불린 이름이고, 기장을 일컫는 다른 이름인 차성은 물레에서 유래한 명칭이라고 한다. 「옥녀직금형의 기장」은 부산광역시 기장군의 지명의 유래를 알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이야기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현재 기장지역의 지명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알려주는 점에서 <차릉>의 존재는 민속학적으로 볼 때, 중요한 기준이 된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차릉>에 대한 문헌기록 중 그 내용이 비교적 풍부한 『남천일록(南遷日錄-孝田散稿)』안에 기록된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차각간 묘(車角干 墓)
1801[신유, 순조 1]년 8월 11일
날이 개었고, 저물게는 음산한 동풍으로 서늘함이 지나가다.
현의 동쪽 3리 만화동에 한 개의 고분이 있는데, 높고 큰 것이 이상하다. 예로부터 전하여 칭하기를 차각간묘라 하였다. 각간은 신라시대 재상의 벼슬이다. 이곳은 신라와 수백리가 넘는 거리로 동경과 이어져 있는 성 밖의 안이다. 차씨 성은 누구인지 알 수가 없으며, 벼슬이 각간에 이르러 죽어서 이곳에 장사지낸 것이다.
묘는 오래도록 손보지 않아 위태롭게 무너져 훼손되었다. 마을에서 한 아이를 고용하여 가련한 마음으로 이 해 곡식이 반쯤 익을 농사철에 벌초를 시키고 봉분을 고쳤다. 마을의 아낙들이 아이를 낳으면, 이 일을 지음에 모두 뜻과 같이하여 마침내 부유한 사람으로 되었다. 이로부터 해를 보는 실례로 지키게 되었으며, 마을 사람들은 오래도록 시작된 그 연고를 알게 되었다. 해마다 음력 8월 10일 쯤 읍의 민속으로 묘에 벌초를 대신하였는데, 차각간 묘를 최우선으로 벌초하였다. 서로 그 정성을 나타내는 겨루기가 되었는데, 누구를 위해 하는 일인지도 알 수가 없었다. 살펴보면, 그것은 체험에 응함이 있었으며, 그 사람이 뼈가 변하여 흙으로 된 것과 또 천 여 년의 세월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한 언덕에 황패하게 붙어있는 혼령을 알게 됨이 어떤 일인가? 이는 보답으로 덮고 얻었으며, 그 몸을 닦고 스스로 삼가하는 노력일 것이다. 그 또한 괴이한 일이라고 할 만한 것이다.(辛酉年 八月 十一日. 晴晩陰東風過涼. 縣東居三里萬花洞有一墳 高大異常 自古傳稱車角干墓 角干 羅制相職 此距東京無數百里 係畿郊之內 車姓者未知何人 位至角干 死葬於此耶 墓久不治 殆崩毁 村中一傭童 心憐之爲伐草 改築封 是歲 童之農偏稔 聚婦生子 作事多如意 卒爲富人 自是 歲視例守護 村人久而始知其故 每仲秋上旬 邑俗代墓草 車墓最先伐 兢相效誠 不知誰所爲 考其有應而驗 知其人與骨化爲土 且千有餘年矣 有何靈識 附在一坏之荒敗 得以償庇其修飭之勞耶 其亦可謂怪事也.)
1801년 심노숭이 <차릉>을 방문할 당시 기록을 근거로 당시 모습을 추정해보면, 묘의 분구는 당시 일반인의 분묘에 비해서 그 규모가 컸음을 알 수 있다. 분묘 주변 일대에서 석물의 존재는 확인되지 않는데, 이는 분구의 흙과 주변 일대의 지형이 유실되면 사라졌을 가능성도 있다.
특히 여름철에 벌초를 시키고 봉분을 고쳤다는 내용은 심노숭이 현장을 보고, <차릉>의 훼손을 바로 고쳤음을 알려준다. 따라서 <차릉>은 훼손된 채 오랫동안 분구의 수즙이나 개축없이 현지에 위치하다가 수리되었음을 알려준다. 그러나 이런 수즙된 모습은 원 모습이 아니므로 고증을 거쳐서 재정비가 이루어질 필요가 크다.
그러므로 지명연원과 함께 일제강점기와 지난 1970년대 이루어진 수즙과정을 통해서 완성된 <차릉>의 외형에서 확인되는 특징들은 다음과 같다.
1) 분묘의 입지에 있어서 단독분으로 조성되었다.
2) 고분의 분구 규모는 현 지름 7m로 일반적인 고려~조선시대 고분들과 비교해 볼 때, 비슷하거나 조금 큰 규모를 보여준다.
3) 주변 일대에 다른 고분군이나 분묘유적이 확인되지 않는 점으로 볼 때, 묘를 조성하면서 주변일대에 대한 제한이 존재했을 가능성이 있다.
4) 현재 기장군의 지명 형성과정과 제 전설 등으로 볼 때, <차릉>의 존재를 당시 사람들이 인식하고 있었음이 확인된다.
이상의 내용을 살펴보면, 먼저 무덤의 주인공, 무덤을 고치게 된 내력과 음력 8월 10일에 행하는 벌초행사에 대한 내용이 확인된다. 현재 문중에서 행하고 있는 제향행사는 이러한 경과를 반영한 것으로 조선 중기 이후의 묘 훼손과 제향행사와의 관련성을 보여준다. 따라서 음력 9월 9일에 거행하는 세향대제(歲享大祭)는 그 연원이 분명하고 지역문화로 중요한 가치를 가지고 있음이 확인된다.
Ⅴ. 맺음말
부산광역시 기장군 만화리 산72번지에 소재한 <차릉>은 현재 연안 차씨종친회 부산, 경남지부와 차류대종회 부산, 경남지부에서 관리하고 있는 묘로 규모는 지름 7m, 높이 3m의 원분이다.
조선시대 후기 인물인 심노숭(沈魯崇:1762~1837)의 개인문집인 『효전산고 (孝田散稿)』 중 「남천일기(南遷日錄)」에는 <차릉>이 과거 신라 제39대 소성왕(799~ 800)과 제40대 애장왕(800~809) 당시 인물로 전하는 차건신(車建申)의 묘로 비정되고 있다.
조선시대의 일반적인 묘지가 아니라 능선의 중앙을 따라서 조성된 3단 구역은 통일신라~고려시대 능묘에 나타난 묘역의 기능구분에 따라서 만들어졌다. 이러한 구분의 목적은 분묘의 성격을 세속적인 구역에서 제의가 이루어지는 경건한 구역 그리고 조상이 잠들고 있는 묘역으로 이어지는 위계적 배치를 보여주며, 이는 오랜 기간 동안 전승되어 내려온 조상 묘에 대한 역사적 가치와 진정성을 나타낸다.
<차릉>은 오랜 기간 동안 관리가 유지되면서 본래의 기능과 경건함을 잘 유지해 왔으며, 특히 도시화가 덜 진전된 곳으로 주변 환경변화의 영향을 받지 않고 있다. 현재 묘 주변으로는 새롭게 개설된 도로 외에는 묘가 조성된 지형과 자연환경은 큰 변화를 겪지 않은 채 원래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점에서 그 가치가 큰 점은 전체적으로 진정성을 유지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차릉>은 통일신라시대 하대에 축조된 분묘로 전하지만, 고고학적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아서, 그 내용을 분명하게 확인할 수 없다. 분묘와 관련된 내용은 구전으로 전하는 내용이 대부분이지만, 1801년에 심노숭이 기록한 내용을 통해서 이후 마을 주민들과 후손들에 의한 묘역관리 모습이 확인되며, 묘를 중심으로 지역 주민들이 인식하고 있는 공간관념과 지명유래가 전하고 있다. 이러한 내용은 고대에 전승되어온 기억과 이야기가 현재까지 이어진다는 점에서 그 가치가 크다.
현재 능묘가 초축된 시점을 통일신라시대로 추정하고 있지만 현재 묘역의 입지환경과 개건된 모습 등으로 인하여, 초축 당시의 원 모습을 확인할 수는 없는 실정이지만, 후손들의 지속적인 관리와 제향을 통해서 유지가 이루어지고 있다.
<차릉>은 현재 문중 안에서는 차건신의 묘로 받들고 있으며, 연안 차씨와 문화 류씨 종친회에서 관리하고 있다. 매년 구력(舊曆) 9월 9일 중양절에는 차류종친회(車柳宗親會) 에서 세향(歲享)을 올리고 후손들의 관리가 계속 이루어지고 있다.
<차릉>은 한 문중의 조상 묘로 오랜 기간 동안 제향이 이루어지고, 이를 중심으로 한 혈연공동체의 공통된 동질성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한국의 전통 풍수지리원리에 의해서 분묘의 입지가 정해졌고, 후손들에 의한 분묘 관리와 정기적인 제례가 결합된 살아 있는 조상 숭배의 전통이 끊어지지 않고 지속적으로 계속 유지된 것이다.
이번 현지조사와 문헌자료를 통한 검토결과 <차릉>의 축조시기를 확정할 수 없지만, 경 묘에 대한 제사가 조선 중기까지 올라가는 감이 확인되었다.
<차릉>은 과거 경상남도 지방문화재 제158호로 지정되어 관리되었으나, 부산광역시와 경상남도 기장군의 통합과정에서 그 지정내용이 이어지지 못한 채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으나, 역사적, 민속적 가치가 지역사회와 역사에 의미가 큰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차릉>이 경상남도 지방문화재 제158호로 지정되어 있다가, 부산광역시와 기장군이 통합되면서 문화재 지정내용이 승계되지 못한 점은 여러 원인이 있겠지만, 유적의 진정성에 대한 문제에 대한 논란문제는 현재 <차릉>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문중의 관리와 제향 그리고 지명유래로 살펴본 지역 주민들의 인식을 고려한다면, 조선시대 후기부터 묘의 존재를 재인식하고 이를 지역 문화유산과 전통으로 이어왔음은 분명한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므로 이상과 같은 내용으로 볼 때, <차릉>은 지역 문화재로서 진정성과 가치를 가지고 있으므로 부산광역시 지방문화재로 지정하여, 지역 공동체의 문화유산으로 그 역사와 전통이 이어지도록 조치하여 지역문화유산으로 활용하면 좋겠다고 사료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