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때는 이랬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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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차병찬 댓글 0건 조회 154회 작성일25-04-27 12:53본문
국민동요 ‘산토끼’ 노래의 발상지인 창녕이방초등학교의 개교(1921) 104주년을 맞는 올해에 1950년대 후반에서 60년대 전반까지 재학시절의 추억을 회상해 본다.
올해 제99회 졸업생을 배출한 바 있는 창녕이방초등학교의 학창시절을 돌이켜보면 지금은 세계적인, 람사르 협약 생태습지의 명소가 되어 우리들의 자랑거리인 ‘우포늪’은 당시에는 여름철 약간의 비만 오면 낙동강의 홍수 범람으로 등하굣길이 침수되어 흙탕물이 허리께까지 올라와 동네에서 학교까지 가는 길을 신작로의 포플라 가로수 가운데를 기준으로 책 보따리를 머리에 얹고 동시에 도롱이와 삿갓을 잡고 가는, 지금 생각하면 우스꽝스러운 몰골로 등하교를 하곤 했다. 또, 6.25 전쟁 당시 낙동강 최후 전선이었던 까닭에 파괴된 교사가 덜 복구되고 또한, 책걸상도 모자라 여름이면 학교 교정의 커다란 플라타나스 나무그늘 아래에서, 겨울이면 남의 양지바른 묘역에서, 각자가 집에서 짚으로 엮어와 본인이 앉을 자리를 만들어 남학생은 책 보따리를 어께에, 여학생은 허리에 매고 또한, 이 짚자리를 등하교시 항시 가지고 다녀야 하던 시절이었다. 이런 학교생활을 하다 3학년 때에서야 꿈에 그리던 교실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책걸상이 모자라 일부는 맨바닥에서 공부해야 했으며, 교실 바닥에 양초를 칠하고 조약돌로 밀어서 24평 교실이 반들반들하게 윤이 나도록 대청소를 한 추억이 있다. 그 이후에 보급된, 겨울철 난로의 연료인 이른바 ‘마세크’탄이라 부르던 갈탄의 수급이 태부족하여 수업을 받아야 할 시간에도 학교 뒷산인 코장산(228.3m)에 올라가 단체로 마른 나뭇가지, 솔방울 등 연료채취 작업을 해야 했다. 그 난로위에 얹어 태워가며 데워 먹던, 노란 알루미늄 도시락에 주로 날된장이나 콩자반과 김치가 주 반찬이던 시절이 지금은 추억의 편린으로 남아있다. 지금이야 추우면 난방, 더우면 에어컨을 가동하고 의복이 좋으니 몸으로 느낄 온한(溫寒)이 그리 크지가 않지만, 그 당시만 해도 추우면 추위를, 더우면 더위를 하루 종일 온몸으로 느껴야 했다. 아침조회시간에 교장선생님 훈화를 듣고 난 후 매주 한 번씩 용의검사를 했는데, 그 항목은 손발을 잘 씻었는지(당시는 겨울이면 대부분의 아이들이 손발이 거북등처럼 갈라터짐) 손발톱은 잘 다듬었는지 등을 검사하였다. 또한, 호롱불 아래서 숙제를 하다 머리카락을 태워오는 아이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었으며, 지금은 멸종되다시피 한 이·빈대·벼룩 등이 기승을 부려 지금은 부작용 때문에 쓰지 않는 DDT를 많이 사용하기도 하였다. 또, 먹거리가 귀하던 시절이라 미국의 잉여농산물원조계획 480호에 의한 옥수수가루, 밀가루, 전지분유 등을 배급받기도 했다. 그래도 봄·가을 현창, 등림, 한터 둑 등으로 소풍을 갈 때면 계란 후라이 덮은 도시락에다 귀한 사이다나 가락엿 한 가락 겨우 살 수 있는 적은 금액이지만 용돈의 맛도 느낄 수 있었다. 당시 우리는 5학년까지는 두 반이었으나, 가사사정 등 여러 이유로 자퇴하는 학생들이 상당히 있던 시절이라 6학년이 되자 72명이 한 반으로 편성되어 그야말로 콩나물시루 교실 이었다. 당시 도시학교에서는 오전반, 오후반이 있었으며, 지금의 20명 내외로 반 편성을 하는 것을 보면 이 또한 격세지감이 든다. 당시에는 600~700여명을 육박하던 전교 학생 수가 지금은 학교의 존폐를 걱정해야 할 정도로 인구의 도시집중 및 농촌인구 감소로 인구절벽을 걱정해야 하는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우리나라 근대사의 격변기라 5학년이던 1960년에 4.19가 있었으며, 이듬해에는 5.16이 일어나서 여름방학 때 임시 소집되어 혁명공약을 외워 그 외우는 순서대로 하교시키던 때가 있었다. 세월이 많이 지난 지금은 국기에 대한 맹세 내용도 바뀌고 행사시 마다 낭독하던 국민교육헌장도 없어졌고, 당시 외우던 혁명공약 제6조는 민간과 군인의 내용이 달랐던 기억도 난다.
세월이 흘러 졸업 40주년이던 2002년에는 모교에서 동기회를 열어 6학년 담임이셨던 김용칠(현재 미국 거주, 목사) 동기생의 부친이신 김태기 선생님과 담임 맡으신 적은 없지만, 늘 우리 곁에 계셨던 차용순 선생님을 모시는 자리를 마련한 적이 있는데, 기억이 많이 나는 또 한분 선생님으로 동산의 노재억 선생님은 우리 동기생 노승현의 부친으로 당시 귀하던 풍금연주를 잘 하셔서 이 반, 저 반으로 이동하시면서 음악을 가르치셨다. 주매에서 자전거로 방골 고개를 넘어 오시던 강우석 선생님, 입학당시의 한탁요 교장선생님도 많이 생각난다. 이런 우리의 37동기회는 지금까지 29번의 모임을 매년 봄 꽃피는 4월 무렵에 열고 있다. 금년에도 우포늪 주변의 노동마을 <우포힐링빌> 팬션에서 16명의 친구들이 동심으로 돌아가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또, 지금은 학교 뒤편에 잘 조성된 ‘산토끼동산’이 여러 가지 놀이시설과 최근에는 사철 썰매장을 열어 전국의 어린이들에게 꿈을 심어주고 있으며, 학교 옆 주택 4채를 매입하고 개조하여 만든, ㈜더본코리아 백종원 대표와의 협업으로 한·중·양식당과 176면의 넓은 주차장을 두고 금년 4월1일 먹거리 업소가 개장되어 따오기 복원으로 더욱 유명해진 우포늪과 우포생태관, 부곡온천 등을 묶어 창녕군의 ‘창녕투어’ 코스로 되어있다는 반가운 소식을 더하여져서 어딜 가나 “저는 우포늪 부근의 국민동요 ‘산토끼‘ 발상지인 이방초등학교 출신입니다” 라고 할 수 있을 자긍심이 되고 있는 우리의 자랑스러운 모교이다. 돌이켜보면 우리 세대는 세계 최빈국에서 태어나 개발도상국을 거쳐 이제는 당당히 세계가 인정하는, 민주화를 이룩하고 선진국 반열에 오르기까지를 한 세대에서 모두 겪은 역사상 유래가 없는 세대가 되었다.
이방초교 제37회 졸업사진(1962.2.10.)
‘산토끼’ 노래학교/창녕이방초등학교 전경
창녕이방초교 37동기회 총회(2025.3.29/30, 우포힐링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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