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산신문 - 차원부와 연안차씨 - 2010년 8월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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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차동박 댓글 0건 조회 76회 작성일24-10-02 21:41본문
(기사 중 일부 인용)
연안차씨는 고려 시대의 대성이었다. 차씨가 몰락하게 된 것은 조선 초기 ‘차원부’ 때이다. 조선 초기의 권신이었던 정도전, 하 륜 등은 외가 쪽으로 차씨 집안의 서녀 출신에 연결된다.
자신들의 혈통상 결함을 은폐하기 위해 차원부를 비롯한 차씨 일족을 제거하게 되면서 차씨의 비극이 시작된다. 당시 차씨 후손들은 사방으로 흩어져서 몰락의 길을 가게 되었다고 ‘차원부 설원기(雪寃記)’에 기록되어 있다.
연안차씨의 분파는 고려 고종 때 장군을 지낸 16세조 차송우의 아들 대에서 나누어진다. 차송우의 첫째 아들 차득규의 후손은 차득규의 아들 차보온의 아들 대에서 4파로 나누어진다.
차보온과 그의 사촌 동생 차공윤 때부터 ‘차씨 집안의 비극’이 태동된다. 차보온의 서녀(庶女)와 차공윤의 서외손(庶外孫)이 각각 하 륜과 정도전의 출생과 연결됐기 때문이다.
따라서 차씨 집안의 참극은 고려 공민왕 때 벼슬을 지낸 ‘차보온’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차보온의 서녀는 조선 개국 공신인 하 륜의 외할머니이다. 차보온의 4촌 동생 차공윤의 딸은 단양우씨 집안의 우연(禹淵)에게 시집간다. 그 서외손(庶外孫)이 조선 초 실력자였던 정도전이다. 이 두 사람 외에 조선 개국 공신인 함부림과 조영규도 차씨 집안의 서외손이다.
그래서 하 륜과 정도전 등은 평소 열등감을 갖고 있었다. 이런 마당에 차보온이 차씨 족보에 이런 내력을 자세히 기록하면서 참극이 벌어지게 된 것이다.
차원부는 고려 공민왕 13년 문과에 올라 간의대부를 지낸 성리학의 대가였으며 사군자를 잘 그렸다. 포은 정몽주, 야은 길 재 등과 함께 많은 제자를 배출했다. 그는 우왕 말년 고려의 국운이 기우는 것을 보고 평산 수운암동에 퇴거해서 자신의 집안 내력을 담은 ‘차류보판(車柳譜板)’을 간행, 해주 신광사에 보관했다.
당시 최고위 권력층에 있던 하 륜, 정도전, 함부림, 조영규 등은 계책을 꾸며 자신들의 출신을 밝힌 차원부와 차씨 일족 71명을 참살한다. 신광사에 보관된 ‘차류보판’은 불살라 버렸다. 국사에 기록된 차씨 가문과 차원부의 덕행 내용도 없앴다. 그 뒤에도 차씨의 인물들에게 여러 죄목을 씌워 유배 보내거나 가산을 몰수했다.
훗날 태종 이방원은 차원부를 좌찬성에 추증하고, 아들 차안경과 손자 차상도를 현량으로 천거한다. 그러나 다시 하 륜 등이 모함하자 차안경은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손자 차상도는 사찰 등지에서 성과 이름을 바꾸고 은둔생활을 하였다.
차상도의 아들들은 노비가에 팔려 성명을 바꾸고 살았다. 태종과 세종 대에 윤 신, 황보인, 박팽년 등의 상소로 세종이 신원해 준다. 그리고 자손을 찾아 등용하게 한다. 단종은 전답을 내리는 한편 박팽년에게 ‘차원부 설원기’를 짓게 하였다.
차씨 가문이 몰락할 당시 차원부와 가까운 사람들은 대부분 죽거나 유배를 당했다. 차원부의 형인 차숭부, 차숭질, 종형인 차밀부는 모두 차원부와 함께 죽임을 당했다.
동생인 차원명과 차현질, 차중부 등은 유배가고 차현경은 선산에, 차견질과 아들 차운혁은 함경도 회령으로 유배되어 3번이나 옮겼다. 차보명은 여흥에서 고용살이를 했으며, 차보륜은 장성에서 아사했다. 또 다른 동생인 차원석은 중국으로 도피했다.
이처럼 차씨 자손들은 목숨조차 부지하기 어려웠다. 자연히 가문의 번성은 기약할 수 없었다. 다시 가문의 번성을 가져올 만큼 크게 현달한 인물도 배출되지 않았다.
연안차씨는 고려 태조 왕건이 후백제를 칠 때 군량을 공급한 공으로 공신이 된 대승공 류차달(柳車達)의 큰아들 차효전(車孝全)을 시조로 한다.
류차달은 신라초 박혁거세 때의 인물인 차무일(車無一)의 후손으로 본래 차씨였다. 차무일의 33세손인 차승색이 그가 섬기던 애장왕을 죽이고 왕위를 찬탈한 헌덕왕 김언승을 암살하려다가 실패, 아들 차공숙과 함께 황해도 신천군 문화면 묵방도로 달아난다. 성씨도 조모의 성인 양(楊)씨로 변성했다가 다시 류(柳)씨로 성을 바꾸었다.
차승색의 6세손 류차달이 고려 건국에 공을 세운다. 태조 왕건은 그의 장남 효전에게 원래 성인 차씨를 다시 쓰게 한다. 그 뒤 차효전이 연안군에 봉해지면서 후손들이 연안을 본관으로 삼았다. /정복규 본사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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