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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안차씨(延安車氏) 강렬공파(剛烈公派) 소개 - 주간 고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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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차동박 댓글 0건 조회 497회 작성일24-06-17 15:12

본문

봉오재 (성산면 오곡1길 45)

기획/특집


연안차씨(延安車氏) 강렬공파(剛烈公派)


본지는 ‘고령지역 세거성씨(世居姓氏) 연원(淵源)을 찾아서’를 격주로 기획 연재한다. 씨족연원(氏族淵源), 현조(顯祖), 고령입향(高靈入鄕) 내력 및 시기, 입향조(入鄕祖) 이 후 역대 인물 등을 문헌적 고증(考證)을 근거로 밝힘으로써 각 문중 고유의 씨족연원(氏族淵源), 열조(烈祖)들의 위업(偉業), 올곧은 정신 및 문화유산(文化遺産)을 이해하는 계기를 마련코자 하오니 관심 있는 문중들의 많은 참여를 바라며, 이번호에는 연안차씨(延安車氏) 강렬공파(剛烈公派)를 소개한다.



1. 씨족연원(氏族淵源)

(1) 시조(始祖)
황제(黃帝)의 후손인 사신갑(姒辛甲)은 고조선 때 평양 일토산(一土山) 아래에 살면서 성을 왕씨(王氏)로 하고 이름은 조명(祖明)이라 하였다. 고조선 말 그의 후손 왕몽(王夢)이 기자조선 준왕(準王)의 모함을 받아 7남 림(琳)과 함께 지리산으로 들어가 숨어서 살게 되었다. 이 때 몽(蒙)은 자손 번창을 이유로 왕씨 성자(王氏 姓字)를 세 번 바꾸어 차자(車字)로 고쳐 성을 차씨(車氏)로 하고, 이름은 무일(無一)이라 하였다. 공은 신라를 세울 때 차무일(車無一)께서 공훈(功勳)으로 시중(侍中) 벼슬에 오르고, 왕으로부터 차씨(車氏) 성(·)을 받게 되어 차씨 득성시조(得姓始祖)가 되었다.《연안차씨세보》에 따르면 상고세계(上古世系)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차건갑(車建甲)은 신라 소성왕(昭聖王) 때의 승상(丞相)으로, 왕이 임종할 때 태자(哀莊王)에게 전위(傳位)하기가 불안하여 그에게 후사를 부탁하였다. 차건갑(車建甲)의 아들 차승색(車承穡)은 아버지를 이어 애장왕 밑에서 승상(丞相)으로 보필하였는데, 애장왕의 서숙(庶叔) 김언승(金彦昇)이 왕과 왕자를 시해하고 헌덕왕(憲德王)에 오르자, 전왕(前王)의 원수를 갚고자 헌덕왕을 죽일 계획으로 거사하였다가 실패하고 황해도의 구월산(九月山)에 은거하였다. 그는 성을 조모의 성을 따라 양씨(楊氏)로 고치려다가 ‘변양위류(變楊爲柳)’ 하여 유씨(柳氏)로 고치고 이름도 색(穡) 외자로 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고려 태조 남정(南征) 시 류씨(柳氏) 6세인 해(海)께서 수레를 많이 내어서 군량의 길이 통하였으므로 류차달(柳車達)이라고 사명(賜名)하였고 삼한(三韓)을 통합하자 익찬벽상2등공신(翊贊壁上二等功臣)으로 대승(大丞)이 되었다. 수공(首功)을 세운 장남 차효전(車孝全)에게는 개국정사1등공신(開國定社一等功臣)에 책록하고 대광(大匡) 벼슬을 제수받았다. 시조(始祖) 차효전(車孝全)은 자(字)가 양운(良運)이고 호(號)가 강촌(江村), 시호(諡號)가 무열공(武烈公)이다. 고려 창업에 공을 세워 개국정사1등공신(開國定社一等功臣)에 책록하고 태조에 의해 대광백(大匡伯)·연안군(延安君)에 봉해졌다.



( 나머지  자세한 내용은  해당링크의 보도기사를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주간고령 2022.0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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